윤두서의 <자화상>은 강렬하다.
한 번 보면 오랫동안 잔상이 남을 만큼 인상적이어서, 그대로 뇌리에 각인된다.
윤두서의 본관은 해남, 자는 효언, 호는 공재이다.
윤선도의 증손이며, 그의 아들은 윤덕희, 외손자가 다산 정약용이다.
젊은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시서생활로 일생을 보냈다.
시/서/화에 두루 능했고, 유학/경제/지리/의학/음악 등 다방면에 능한 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태어난 지 이레 만에 큰집에 입양되어 자랐으며, 15세에 혼인하여 2남 1녀를 낳았으나, 22세에 부인이 죽었다.
27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27세에 양아버지가 죽고, 29세에 셋째 형이 당쟁에 휘말려 귀양 갔다가 이듬해 죽었다. 30세에 큰형과 함께 모함에 연루되어 고생하였고, 그 후 벼슬을 뜻을 아예 버리게 된다.
32세에 친아버지가 죽고, 37세에 친어머니가 죽고, 39세에는 절친 이잠이 흉서를 올렸다 하여 맞아죽었다. 43세에는 또 다른 벗인 심득경이 죽고, 45세에는 양어머니가 죽었다.
그의 아들 윤덕희가 쓴 윤두서 <행장>에는 공재의 나이 삼십여 세에 벌써 머리에 백발이 보였다 하였는데, 그 이유를 알만한 삶이었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미완성 작품이다.
강렬한 인상의 얼굴과 세밀한 수염 묘사에 눈길을 뺏겨 잊고 있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귀가 없고, 몸통이 없어 마치 머리만 공중에 떠있는 모습니다.
이 작품이 미완성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근거가 있다.
1937년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집하고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사료집진속>이라는 책의 제 3집에 윤두서 자화상의 사진이 자료로 실려 있다.
그 사진속의 윤두서 자화상에는 상의의 윤곽이 그려져 있다. 상체가 있는 것만으로 윤두서 자화상의 인상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머리만 떠있는 것보다는 부드러운 인상으로 보인다.
당시 유탄으로 스케치만 해두었던 것이 세월이 지나고 보관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혹은 이후에 표구를 하는 과정에서 과도하게 작업을 하면서 그 흔적이 지워진 것으로 보인다.
그림에 종이가 접혀 있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완성작이었다기보다 미완의 작업물을 둥글게 말아 보관하다가 이리저리 눌려버린 것 같기도 하다.
윤덕희가 윤두서 <행장>에서 윤두서의 “용모와 말씨가 중후하고 존엄했다.”라고 하였는데, 상의가 훼손되기 전 그의 자화상에서 그것이 그대로 느껴진다.
하지만 미완성의 작품이라고 해서, 그것의 작품성마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대 국보로 지정될 만큼 모두가 인정하는 완성도와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윤두서가 직접 그린 <자화상>은 조선 숙종 36년 (1710년) 제작되었으며, 1987년 12월 26일 대한민국 국보 제240호로 지정되어 윤두서의 집안인 해남 윤씨의 종가 녹우당에서 소장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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