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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황금과 에로티즘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by jittymitty 2023. 1. 27.

 

 

구스타프 클림트는 1862714일 빈 교외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금속 조각가인 어머니 안나와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금세공사이자 판화가인 아버지 에른스트 클림트 사이에서 태어난 일곱 형제 중 둘째였습니다. 187610, 구스타프는 빈 응용예술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에는 동생인 에른스트까지 입학하여 함께 수학했습니다.

 

구스타프와 동생인 에른스트 클림트는 1883년 학교를 졸업한 후 동료 화가 프란츠 마치와 함께 독자적인 스튜디오 쿤스트러 컴퍼니를 설립하고 공공건물에 벽화 그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곧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스위스, 발칸 국가 전체에 홍보를 하고 주문을 받았습니다. 1886년 쿤스트러 컴퍼니는 첫 번째 중요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빈에 새로 건설된 부르크 극장의 천장을 도장하는 일이었는데, 황제 프란츠 요셉 1세는 이들이 채색한 장식에 크게 만족했습니다.

 

클림트는 결혼하지 않았지만, 많은 모델들과의 관계를 즐겼고, 패션 디자이너였던 처제 에밀리 프레게와 오랫동안 플라토닉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구스타프의 아버지는 1892713일에 죽었고, 그의 동생 에른스트도 같은 해 129일에 죽게 되자, 구스타프는 동생의 딸 헬렌 루이스의 보호자가 됩니다. 쿤스트러 컴퍼니는 에른스트 클림트의 죽음과 구스타프의 화법의 변화로 인해 이 시기에 서서히 해체되었습니다.

 

클림트는 1892년 아버지와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으로 정신적인 동요를 겪으며, 인상파와 상징주의 등 다양한 아방가르드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순수와 응용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총체적인 예술을 지향했습니다. 1897년 당시 보수적인 미술 단체의 일원이었던 클림트는 낡고 판에 박힌 사상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 미술과 삶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에 접근하고자 하는 빈 분리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칼 몰, 오토 바그너 등 당대 오스트리아를 선도한 화가, 디자이너, 건축가들이 빈 분리파에 참여했습니다.

 

관능적인 여성 이미지와 찬란한 황금빛, 화려한 색채가 특징인 클림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극적인 에로티시즘을 강조했다는 이유로 강력한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빈 대학교 대강당의 천장에 차례로 그린 우의적인 장식화 철학, 의학, 법학은 그 외설성으로 인해 빈 대학교 교수들과 정면충돌하게 됩니다. 이 일로 클림트는 더 이상 공공작품을 의뢰받지 않았으며, 기하학적이고 지적인 추상 양식으로 변모해가게 됩니다.

 

클림트는 빈 분리파가 더 이상 본래의 취지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에 낙담하고 1905년 빈 분리파를 탈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그의 황금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되었고, 클림트는 이탈리아 라벤나의 모자이크와 장식적인 패턴, 금을 사용하여 눈에 띄는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키게 됩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신비로운 것과 정신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매우 화려하고 역동적이며, 에로틱한 요소와 강렬한 상징주의 등을 지속시켜 나갔습니다.

 

클림트는 1918111일 갑작스런 뇌출혈로 쓰러진 후, 같은 해 26일 합병증으로 56세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주요 작품에는 유디트(1901), 연인(키스)(1907~1908), 다나에(1907~1908), 아담과 이브(1917~1918) 등 많은 작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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