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화가 김명국이 그린 달마는 가장 유명한 달마도 중 하나다.
힘찬 먹선 몇 개만으로 강렬한 인상의 달마를 표현하고 있다.
김명국(1600~1662년 이후)은 조선시대 천민 출신의 화원이었다. 성품이 호탕하며, 술을 매우 좋아했다.
그의 별호가 '취한 늙은이'라는 뜻의 '취옹'인 것만 보아도 얼마나 술을 좋아했는지 알만하다. 김명국은 술을 마신 후 붓을 잡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래서 그의 그림을 얻으려는 자들은 술상을 마련해야만 했다고 한다.
김명국은 도화서 화원을 거쳐 사학 교수를 지내다가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총 12차례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으로 조선은 통신사를 통해 조선 문화의 우수성을 일본인들에게 과시하고 문화외교의 전략을 세우려했다. 17세기 통신사는 두 나라 사이의 문화사절단으로의 역할을 수행했다. 따라서 통신사에는 조선 최고의 예술인들이 선발되었고, 특히 수행화원은 일본인들의 요구로 모든 사람이 아는 당대 최고의 화원을 선발할 정도로 인기였다.
화가로서 김명국은 당시 일본에서도 인기가 대단하였고, 통신사에 포함된 김명국의 그림을 얻기 위한 일본인들의 경쟁도 치열했다. 김명국은 통신사 일정에서 도석인물화를 많이 그렸다. 일본인이 신선도를 좋아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짧은 시간에 많이 그려낼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넘치는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생산이 가능한 화법이었던 셈이다.
김명국은 중국 선종의 선조인 보리달마를 많이 그렸다.
달마는 남인도 대바라문국의 세 번째 왕자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 중국에 불교를 전파하라는 스승 반야다라의 명을 따라 3년 동안 배를 타고 캄보디아를 거쳐 중국에 도착해 서기 520년 경 중국에 건너가 숭산의 소림사에 머물렀다.
당시 이론을 중시하는 교종이 대세였던 중국 불교계에 "마음으로 마음을 전한다"는 이심전심의 선종을 전파하게 된다. 중국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는 불교의 참된 깨달음과 실천행을 강조했으며, 당시 9년 동안이나 벽을 바라보고 앉은 채 면벽수행을 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달마도>는 김명국이 통신사 여정에서 그렸던 도석인물화이다. 하마터면 일본에 전해지려던 것을 뒤늦게 구입하여 한국에 들여왔다.
김명국의 <달마도> 속 달마는 인도인 특유의 매서운 눈매와 도드라진 코가 이국적이며, 단 몇 번의 거칠고 굵은 붓질만으로 완성된 달마의 옷자락은 달마의 굳은 철학과 심오한 정신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인물화와 수석화에 유려한 화법을 구사하였던 김명국은 <달마도> 외에도 <설중귀려도>, <심산행려도>, <노엽달마도>, <기려도>, <관폭도>, <투기도>, <은사도>, <사시팔경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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